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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봉정암 2010, 10월,24일 저녁 늦은 시간 -양진이

시인양진이 2021. 2. 27. 16:59

봉정암 2010, 10월,24일 저녁 늦은 시간 - 양진이

 

몇 십 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설악산에 있는 봉정암에 가게 되었다. 삼세 인연법이 닿아야 간다라는 말대로 많은 기다림 끝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우연히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봉은사 가는 중에 옆자리 않은 아주머니가 부산고향 말로 어디 가느냐 묻기에 봉은사 간다하니 본인도 숙대부근에 사는데 봉은사 다닌다고 고향사람이라 반기며, 내일 금요일 봉정암 가기로 했는데 사정이 생겨 못 간다고 11월 달에도 가는 날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했다. 전화번호 주고받고 헤어졌다, 봉은사 절에 참배하고 불현 듯 내일 가야겠다는 마음이 치솟아 나 혼자 라도 가고 싶었다.

드디어 20101022일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서울에서 잠실 4번 출구 나가니 한강고속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봉정암 가는 차편이었다. 강원도 용대리에 도착 그곳에서 마을버스타고 백담사에 내려 참배하고<그곳은 전직 전두환 대통령귀거하던곳> 구경하고 출발하여 영시암 도착 점심공양하고<영시암은 오가는 길손들 무료로 국수를 준다.. 총각김치가 넘 맛있었다> 곧장 걷기 시작하여 정학한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6시간 걸어야 된단다<영시암에서 봉정암까지>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 약3시간 남짓<모든 시간은 초행이라 시간은 정확히 계산안하고 했기에 정확하지 않다>

삼세인연법에 멋모르고 나선 길 아는 동행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백담사에서 걷고 또 걷고 봉정암을 향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봉정암 도대체 어디에 꼭꼭 숨었기에 육신의 고통을 감내할까? 전생에 얼마나 많은 억 급을 지었기에 다리에 지가 나도록 숨이 헉헉 기어오르다가 또 평지 평생에 이런 길은 처음 걸어보는 것이다. 살아 희, , .,모두 맛보는 것 같다.

완만한 길을 가다가 철계단을 가다. 오르막 구름다리를 건너갈 때 부처님 조화인가 첩첩산중에 예쁜 무지개다리 구름다리 말로 표현 못할 멋지고 감동의 전율이 솟구친다. 산속깊이 과연 인간에 힘으로 이런 멋진 다리를 놓았을까 그림 같은 폭포가 쏟아지고 눈으로 다. 담을 수 없는 풍광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입은 색깔들의 선명한 고운 잎들 오염되지 않은 지상낙원 고달 펐던 일상의 무게들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감사하며 또 걷다보면 가파른 오르막을 잡을 것조차도 없을 정도로 기어오르고 넘어서면 또 평지 또 철계단 또 오르막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도 이렇게 혹독했지만 중간 중간 그림 같은 구름다리도 만나고 좋은 틈새가 있어 내가 버틸 수 있지 않았나하며 자위하며 이렇게 나를 변화시키며 이곳까지 이제껏 내가 있지 않는가?

고통 속에 맛보는 경관 진국 같은 이 순간 혼자 외로움에 치를 떨다가도 환희에 젖어 아, 내게도 이런 오감을 맛볼 때가 있구나! 혼자 맛보기가 아쉬워 내 가족을 떠 올렸다. 남편은 시험 준비에 바쁘고<공인중개사> 딸은 의사고시 아들은 의사선생님 막내아들은 무슨 공부인지 또 시험 준비하느라, 이 좋은 아름답고 경치 좋고 맑은 공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떨어지는 폭포 수정보다 맑은 물과 공기 이생에서 그 누가<내식구>중에 이 맛을 보려 이런 무릉도원에 발 디딜까 묻고 싶다.

저들을 나와 같이 밑바닥생활을 벗어나게 하려고 온갖 시름 겪으면 지옥불이라도 들락거리며 수모를 당하면서라도 저들을 편하고 인간답게 대접받게 하려고 노력한 덕인가 잘 먹고 잘되었다. 저만하면 사회 상위 일원으로 살아간다. 못 먹고 못 입고 손가락질 당해가며 버티며 누구도 감히 흉내 못 낼 의사 둘에다 공무원, 셋을 그림처럼 길러 내다보니 헐벗은 건 당연한 것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저들이 복이 있으니 나와 같은 어미를 만난 거니깐. 이제는 세상이 풍부해졌다. 먹거리도 풍족해지고 내 새끼들이 공부할 땐 왜 그리도 부족하고 가난했었는지 그때는 쌀과 연탄만 그득하면 부자 안 부러울 정도로 궁핍한 시대였다. 갈수록 살기가 좋아지지만 한번 맨 땅을 치고 일어서기가 많은 힘이든 다. 여전히 어려운 사람은 어렵게 산다. 내가족 내 식구들도 이런 무릉도원을 맛보이고 싶다.

이것도 욕심일까 깊은 산중을 들어설수록 자연의 이치가 사람의 생활과 같다. 내리막과 오르막 죽을 것 같이 긴 고통 오감을 맛보며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난다. 가냘픈 여자에서 12남의 어미라는 책임감이 시작되었다. 나는 비록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지만 금쪽같은 내 자식들은 무슨 짓을 하드래도 밑바닥에서 벗어나게 해아 한다는 사명감이 무게가 실렸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현실 앞에 설움이 복받쳐 울어본들 누구하나 붙잡을 언덕이 없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았다. 식당에 설거지 밑천 없이 시작한 국자에 설탕 녹여 팔 때 부끄러워 수건을 덮어쓰고 남을 의식하다가, 그것도 사치 같아 벗어던지고 대담해졌다. 쌀이 없어 애들을 굶길 순 없었기에 무능한 남편은 10원짜리 공중전화 걸 돈이 없어 골방에서 꼼짝도 안하고 시골 가서 고구마라도 얻어오려고 갔다가, 괴모와 아버지에게 입고 간 옷을 뜯기여 울면서 빈손으로 왔다.

10원 짜리 똥과자 장사를 하니, 저녁이면 10원짜리 돈이 그득 쌀을 한 되씩 살 수가 있어서, 애들을 먹일 수 있었다. 참담했다. 여기서부터 장사가 시작되었고 용기를 얻어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크게는 땅장사 집장사 밑천은 집안오빠가 고등법원행정고시해서 공무원으로 있었다. 처녀 때부터 각별히 잘 챙겨 오빠친구 오빠 나 3명이 투자를 해서 내가 땅을 사서 많이 남아 셋이 똑같이 나누고, 난 덤으로 많이 챙겨주어서, 그것이 발판이 되어 집장사가 시작되었다.

밑돌 빼어서 윗돌 공구고 이사를 밥먹듯해가며 남에게 빌린 빛을 줄이고 나중엔 남이 부러워하는 좋은 집도 사고 애들 가르치는데 걱정 없이 되었다. 지나온 시련을 어찌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금쪽같은 내 자녀들 첫째 딸이 동생들 잘 챙겼고 공부들도 잘해주었다.

너무도 어려운 시절 부처님 찾아가는 도량에서 참회합니다. 헐 벗고 살면서 오로지 내 자식들만 위하고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나름 바른 길로 달렸습니다. 부족한 점 참회합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봉정암 이래서 삼세인연법이 없으면 못 온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걷고 또 걸어서 도착했다.

봉황이 활짝 편 날개 중에 왼쪽 날개 밑에 법당이 있고 정수리 머리에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신기하게도 바위에 놓여있다. 옆으로 용화상 맞은 건너에 코끼리 바위 사리탑 전망대에서 내려 보니 깎아지른 바위산들 천길 낭떠러지 부처님의 도량 지상낙원일세! 이렇게 높은 곳에 부처님 도량이 있는 걸 눈으로 실감하며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이곳에서 일박하고 내일 오세암으로 간다. 방을 배정받은 것은 가로 세로 재어 보지 않았다. 보통사람 반듯이 눕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워도 그려놓은 금을 넘어 서로서로 들 붙어서 잠을 자야한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넓은 공간이라 한다. 자로 그어 놓은 칸수가 99칸인데 이곳에서 조차도 못자고 한데<바깥>에서 많이 잤단다. 요즈음은 예약제가 되어 바깥에서 자는 일은 없단다.

죄 많은 나에게도 날씨 덕은 있는지 춥다고 겨울옷을 준비해 오라 했는데 그런 대로 견딜 만 할 정도로 따뜻하고 날씨도 청명했다. 바람도 없고 죄 중에 좋은 죄도 있었나보다. 공양은 미역국에 밥 한 덩이 오이무침 몇 조각 이것도 이런 환경 속에선 감사하고 훌륭하다. 사람 몸도 놓아두고 올 정도로 험하고 깊은 구중산중 꼭대기다.

이런 곳에 물도 귀하다. 설산에서 고행하신 부처님에 비하면 행복이랄까 감사하다. 죄 많은 인생이 단단히 고행 맛을 보나 보다. 도착해 방 배정 받고 걸머지고 온 짐은 풀어놓고 세면장에 내려가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같이 온 사람들은 홀랑 벗고 목욕재개 하는걸 보니 한기를 느껴 난 못하고 씻을 수 있는 곳만 씻고 방에 오니 어스스 추웠다. 따뜻하고 편리한 집이 아닌 설산이라 생각하자 정신차려보려고 애썼다. 부처님 참배하고 이곳저곳 신기하기 만한 딴 세상 구경하고 밤을 지샜다. 밤에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고행이었다.

날이 밝았다. 530분 참배하고 공양하고 625분에 대청봉엘 가잔다. 이곳까지 와서 대청봉에 가자고 모두 나서 자의반 타의반 막상 나서고 보니 어제 깔닥고개 오르는 것과 같은 오르막을 소청봉까지 계속되었다. 잘못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너무 힘이 들었다. 내친 길 부처님 욕심을 부려 죄송합니다.

무사히 잘 갔다 오게 해달라고 염불하며 헉헉거리며 걷고 또 걷고 소청봉 휴게소<대피소> 중청봉대피소 지나 대청봉 정상에 도착 사방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히 저 밑에 인간 세상이 어지럽혀있다. 저속에서 아웅다웅 아귀다툼하며 살았단 말인가? 호수 같은 운무가 장관을 이루고 호수인가 착각할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운무다.

자주 오는 산악인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이런 날씨 보기 힘들다고 저 멀리 널펀한 삼척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높은 산들을 정상에서 사방을 내려다. 보는 이 절묘함은 어느 효자 아들이 업어다. 구경시킬 수 있을까 오직 부처님 음덕으로 건강함에 기쁘고 이런 곳에 오른 성취감에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벅찬 이 마음을 내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데 이 시각 전화 받을 사람은 막내 지호뿐이다. 그나마 나와 좋은 인연 같다. 전화했다. 감격하며 좋은 기를 나누어주고 싶다. 대청봉이야 넘좋다. 사랑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려 다시 걷기시작 중청봉 대피소엔 많은 인파가 인 산을 이뤘다. 언제 어디서 왔는지 이런 아침에 눈이 쌓였고 얼음이 언 산속 이곳저곳서 아침을 해결하느라 갖가지 싸온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중에 아이들도 섞여있었다. 착하다. 내 자식들을 비교했다. 누가 어미 따라 올려고 할까? 저런 애들은 건강한 정신력이 좋아 넓은 사고를 가지고 성숙하겠지 부럽고 유전자가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남을 부러워하며 박수를 보낸다.

재바르게 갔다 온 탓인지 3시간정도 걸렸다. 한방에 같이 잔 사람들이 참 빨리 갔다. 왔단다. 잠시 쉬었다. 점심공양하고 오세암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렸던 봉정암을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세암으로 간다. 봉정암 정상 뒷길 깎아지른 절벽 내리막길 첫 걸음부터 난관이다. 천길 낭떠러지 질퍽한 물기 있는 내리막길이다.

몇 걸음 먼저 간 노부부 서울서 출발할 때 옆자리에 않았고 부인은 내 옆자리 나와 붙어 자던 그 부부가 남편이 몇 번 굴러 떨어져 피가 낭자해 비탈길에서 안절부절<부인>남편의 붉은 피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봉청회 모집해 온 단원에 전화를 하니 전화가 안 되다.

빨리 누구 좀 스님에게 올라가 말씀드리라고 소리쳤지만 모두 겁에 질려 맨 위에 있던 사람이 갔는지 알 수 없어 그런지 부인이 뛰어 올라갔다. 걸음이나 제정신으로 올라갔는지 조금 있으니 헬기가 떴다. 마침 올라오는 등산객 남자가 자기가 의사라면서 거즈로 지혈을 시키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편했다. 우리들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함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뒤에서 의사선생님이 걸을 수 있어요. 다행히 걸을 수 있단다.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큰 문제없이 외상으로 그쳤음 빈다. 이런 상황들을 뒤로하고 내리막길 내려오는 길은 험했다. 질퍽한 물이 흐르는 바위돌이 미끄럼 타기 좋은 매끈한 큰 바위 돌들이 길이다. 쇠파이프를 한 줄로 박아 놓은 난간대를 잡고 몸을 그곳에 매달려 내려가는 길이 이어졌다. 내 딸을 안 데려 온 것이 다행이다. 혼자가기 그러하니 시험도 끝나고 같이 가자했다. 피곤해 도저히 못가겠다고 해서 혼자 나선 것이다. 참 다행이다.

올려쳐다보니 경사도가 심해 길을 만들 수도 없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녔을 길인데 깎아지른 비탈이다. 보니 비가 오면 머물 곳도 없이 흘러 길이 없는 것은 기정사실의 지형이다. 험한 길을 지나니 조금은 낳은 길이라도 질퍽한 물기에 미끄러워 제대로 걸어 나가기가 힘든 길을 한참을 가다보니, 이제는 오르막 이런 오르막 고개를 크게는 세 고개를 넘어야 오세암이란다. 오세동자가 성불한 곳이라 하니 오세암이란다.

오르기 힘은 들었지만 봉정암 뒤 높은 산 비탈길 질퍽한 길은 이제는 없나보다. 혼자 노래하며 염불하며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갖가지 예쁜 물을 들인 비단옷을 입은 이름 모를 나무들 극락세계 같은 환희에 젖으며 부처님이 나에게도 이런 값진 선물 주심에 감사하며 높은 고개를 넘고 넘어 오세암에 도착하니 또 다른 세계의 부처님 도량이 나타났다. 높은 곳에 있는 봉정암과 달리 낮은 산속에 안정되게 자리 잡은 엄마 품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았다.

그곳에 내가 우리 팀에서 첫 번째 도착 방배정이 되어 있었다. 봉청회 라고 하룻밤 거처할 방이었다. 이곳은 이불 베개도 있었다. 짐을 풀고 먼저 부처님께 참배부터 했다. 무사히 부처님 원력으로 잘 도착 했노라고 보고하고 세면도구를 챙겨 세면장에 가서 홀랑 벗고 깨끗이 닦고 비누는 일체 쓰지 말라고 적어놓아 물로 머리감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뻑뻑한 파마머리 샴푸를 해도 빗이 안 빗겨지는데 이곳 물은 무슨 물 이길래, 참물로 감았는데 데도 매끈거려 기분이 좋았다. 이곳은 봉정암에 비해 물이 철철 흘러버려 물이 흔했다. 참 오랜만에 흘러 내려가는 물에 마음껐 씻었다.

이곳에 일박하고 내일 아침530분에 주먹밥 가지고 어둠을 헤치고 내려가야 한단다. 주말이라 인파가 많아 차를 기다리지 않고 탄단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게 일찍 못 간다는 사람 가야한다는 사람 다수결의 끝에 아침 공양은 미역국에 밥 말아먹지 않고 주먹밥 부탁해서 받아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경험자 자주 오는 사람들에 의하면 주말엔 마을버스<백담사에서용대리가는것>타려면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탄다하니 나도 이왕 온 걸음인데 천천히 더 있고 싶었지만 다수결의에 따라 오세암에서 백담사까지 3시간30분여 어둠을 뚫고 걸었다. 백담사에오니 마을버스가 있었고 선착 순 대로 올랐다.

용대리에오니 한강 고속버스 봉청회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첫 번째 출발하는 10시에 출발한단다. 용대리 이곳엔 사람인파가 올라가는 차를 타기위해 두 줄을 선 줄이 끝이 안 보인다. 참 많은 사람들이다. 산은 저 많은 사람들을 품어줄 것이다. 갖가지 사연들 일상에 찌던 때 벗겨줄 것이다. 몸과 마음의 혼탁함을 청아한 공기로 품어줄 것이다.

나처럼 척박하게 살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나온 때를 벗고 오는 세상은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고 좋은 일들만 가득 채워지길 모두에게 바라며 부처님의 가피를 입길 바랍니다. 표현은 미흡했지만 산은 인생살이 진리를 느끼며 깨달으며 부족한 소치를 깨달음을 주는 곳 철없는 사람을 깨우치는 곳 산 산 도량 고맙고 사랑합니다!

 

봉정암 2010, 10,24일 저녁 늦은 시간

양진이

몇 십 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설악산에 있는 봉정암에 가게 되었다. 삼세 인연법이 닿아야 간다라는 말대로 많은 기다림 끝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우연히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봉은사 가는 중에 옆자리 않은 아주머니가 부산고향 말로 어디 가느냐 묻기에 봉은사 간다하니 본인도 숙대부근에 사는데 봉은사 다닌다고 고향사람이라 반기며, 내일 금요일 봉정암 가기로 했는데 사정이 생겨 못 간다고 11월 달에도 가는 날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했다. 전화번호 주고받고 헤어졌다, 봉은사 절에 참배하고 불현 듯 내일 가야겠다는 마음이 치솟아 나 혼자 라도 가고 싶었다.

드디어 20101022일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서울에서 잠실 4번 출구 나가니 한강고속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봉정암 가는 차편이었다. 강원도 용대리에 도착 그곳에서 마을버스타고 백담사에 내려 참배하고<그곳은 전직 전두환 대통령귀거하던곳> 구경하고 출발하여 영시암 도착 점심공양하고<영시암은 오가는 길손들 무료로 국수를 준다.. 총각김치가 넘 맛있었다> 곧장 걷기 시작하여 정학한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6시간 걸어야 된단다<영시암에서 봉정암까지>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 약3시간 남짓<모든 시간은 초행이라 시간은 정확히 계산안하고 했기에 정확하지 않다>

삼세인연법에 멋모르고 나선 길 아는 동행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백담사에서 걷고 또 걷고 봉정암을 향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봉정암 도대체 어디에 꼭꼭 숨었기에 육신의 고통을 감내할까? 전생에 얼마나 많은 억 급을 지었기에 다리에 지가 나도록 숨이 헉헉 기어오르다가 또 평지 평생에 이런 길은 처음 걸어보는 것이다. 살아 희, , .,모두 맛보는 것 같다.

완만한 길을 가다가 철계단을 가다. 오르막 구름다리를 건너갈 때 부처님 조화인가 첩첩산중에 예쁜 무지개다리 구름다리 말로 표현 못할 멋지고 감동의 전율이 솟구친다. 산속깊이 과연 인간에 힘으로 이런 멋진 다리를 놓았을까 그림 같은 폭포가 쏟아지고 눈으로 다. 담을 수 없는 풍광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입은 색깔들의 선명한 고운 잎들 오염되지 않은 지상낙원 고달 펐던 일상의 무게들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감사하며 또 걷다보면 가파른 오르막을 잡을 것조차도 없을 정도로 기어오르고 넘어서면 또 평지 또 철계단 또 오르막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도 이렇게 혹독했지만 중간 중간 그림 같은 구름다리도 만나고 좋은 틈새가 있어 내가 버틸 수 있지 않았나하며 자위하며 이렇게 나를 변화시키며 이곳까지 이제껏 내가 있지 않는가?

고통 속에 맛보는 경관 진국 같은 이 순간 혼자 외로움에 치를 떨다가도 환희에 젖어 아, 내게도 이런 오감을 맛볼 때가 있구나! 혼자 맛보기가 아쉬워 내 가족을 떠 올렸다. 남편은 시험 준비에 바쁘고<공인중개사> 딸은 의사고시 아들은 의사선생님 막내아들은 무슨 공부인지 또 시험 준비하느라, 이 좋은 아름답고 경치 좋고 맑은 공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떨어지는 폭포 수정보다 맑은 물과 공기 이생에서 그 누가<내식구>중에 이 맛을 보려 이런 무릉도원에 발 디딜까 묻고 싶다.

저들을 나와 같이 밑바닥생활을 벗어나게 하려고 온갖 시름 겪으면 지옥불이라도 들락거리며 수모를 당하면서라도 저들을 편하고 인간답게 대접받게 하려고 노력한 덕인가 잘 먹고 잘되었다. 저만하면 사회 상위 일원으로 살아간다. 못 먹고 못 입고 손가락질 당해가며 버티며 누구도 감히 흉내 못 낼 의사 둘에다 공무원, 셋을 그림처럼 길러 내다보니 헐벗은 건 당연한 것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저들이 복이 있으니 나와 같은 어미를 만난 거니깐. 이제는 세상이 풍부해졌다. 먹거리도 풍족해지고 내 새끼들이 공부할 땐 왜 그리도 부족하고 가난했었는지 그때는 쌀과 연탄만 그득하면 부자 안 부러울 정도로 궁핍한 시대였다. 갈수록 살기가 좋아지지만 한번 맨 땅을 치고 일어서기가 많은 힘이든 다. 여전히 어려운 사람은 어렵게 산다. 내가족 내 식구들도 이런 무릉도원을 맛보이고 싶다.

이것도 욕심일까 깊은 산중을 들어설수록 자연의 이치가 사람의 생활과 같다. 내리막과 오르막 죽을 것 같이 긴 고통 오감을 맛보며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난다. 가냘픈 여자에서 12남의 어미라는 책임감이 시작되었다. 나는 비록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지만 금쪽같은 내 자식들은 무슨 짓을 하드래도 밑바닥에서 벗어나게 해아 한다는 사명감이 무게가 실렸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현실 앞에 설움이 복받쳐 울어본들 누구하나 붙잡을 언덕이 없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았다. 식당에 설거지 밑천 없이 시작한 국자에 설탕 녹여 팔 때 부끄러워 수건을 덮어쓰고 남을 의식하다가, 그것도 사치 같아 벗어던지고 대담해졌다. 쌀이 없어 애들을 굶길 순 없었기에 무능한 남편은 10원짜리 공중전화 걸 돈이 없어 골방에서 꼼짝도 안하고 시골 가서 고구마라도 얻어오려고 갔다가, 괴모와 아버지에게 입고 간 옷을 뜯기여 울면서 빈손으로 왔다.

10원 짜리 똥과자 장사를 하니, 저녁이면 10원짜리 돈이 그득 쌀을 한 되씩 살 수가 있어서, 애들을 먹일 수 있었다. 참담했다. 여기서부터 장사가 시작되었고 용기를 얻어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크게는 땅장사 집장사 밑천은 집안오빠가 고등법원행정고시해서 공무원으로 있었다. 처녀 때부터 각별히 잘 챙겨 오빠친구 오빠 나 3명이 투자를 해서 내가 땅을 사서 많이 남아 셋이 똑같이 나누고, 난 덤으로 많이 챙겨주어서, 그것이 발판이 되어 집장사가 시작되었다.

밑돌 빼어서 윗돌 공구고 이사를 밥먹듯해가며 남에게 빌린 빛을 줄이고 나중엔 남이 부러워하는 좋은 집도 사고 애들 가르치는데 걱정 없이 되었다. 지나온 시련을 어찌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금쪽같은 내 자녀들 첫째 딸이 동생들 잘 챙겼고 공부들도 잘해주었다.

너무도 어려운 시절 부처님 찾아가는 도량에서 참회합니다. 헐 벗고 살면서 오로지 내 자식들만 위하고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나름 바른 길로 달렸습니다. 부족한 점 참회합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봉정암 이래서 삼세인연법이 없으면 못 온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걷고 또 걸어서 도착했다.

봉황이 활짝 편 날개 중에 왼쪽 날개 밑에 법당이 있고 정수리 머리에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신기하게도 바위에 놓여있다. 옆으로 용화상 맞은 건너에 코끼리 바위 사리탑 전망대에서 내려 보니 깎아지른 바위산들 천길 낭떠러지 부처님의 도량 지상낙원일세! 이렇게 높은 곳에 부처님 도량이 있는 걸 눈으로 실감하며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이곳에서 일박하고 내일 오세암으로 간다. 방을 배정받은 것은 가로 세로 재어 보지 않았다. 보통사람 반듯이 눕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워도 그려놓은 금을 넘어 서로서로 들 붙어서 잠을 자야한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넓은 공간이라 한다. 자로 그어 놓은 칸수가 99칸인데 이곳에서 조차도 못자고 한데<바깥>에서 많이 잤단다. 요즈음은 예약제가 되어 바깥에서 자는 일은 없단다.

죄 많은 나에게도 날씨 덕은 있는지 춥다고 겨울옷을 준비해 오라 했는데 그런 대로 견딜 만 할 정도로 따뜻하고 날씨도 청명했다. 바람도 없고 죄 중에 좋은 죄도 있었나보다. 공양은 미역국에 밥 한 덩이 오이무침 몇 조각 이것도 이런 환경 속에선 감사하고 훌륭하다. 사람 몸도 놓아두고 올 정도로 험하고 깊은 구중산중 꼭대기다.

이런 곳에 물도 귀하다. 설산에서 고행하신 부처님에 비하면 행복이랄까 감사하다. 죄 많은 인생이 단단히 고행 맛을 보나 보다. 도착해 방 배정 받고 걸머지고 온 짐은 풀어놓고 세면장에 내려가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같이 온 사람들은 홀랑 벗고 목욕재개 하는걸 보니 한기를 느껴 난 못하고 씻을 수 있는 곳만 씻고 방에 오니 어스스 추웠다. 따뜻하고 편리한 집이 아닌 설산이라 생각하자 정신차려보려고 애썼다. 부처님 참배하고 이곳저곳 신기하기 만한 딴 세상 구경하고 밤을 지샜다. 밤에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고행이었다.

날이 밝았다. 530분 참배하고 공양하고 625분에 대청봉엘 가잔다. 이곳까지 와서 대청봉에 가자고 모두 나서 자의반 타의반 막상 나서고 보니 어제 깔닥고개 오르는 것과 같은 오르막을 소청봉까지 계속되었다. 잘못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너무 힘이 들었다. 내친 길 부처님 욕심을 부려 죄송합니다.

무사히 잘 갔다 오게 해달라고 염불하며 헉헉거리며 걷고 또 걷고 소청봉 휴게소<대피소> 중청봉대피소 지나 대청봉 정상에 도착 사방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히 저 밑에 인간 세상이 어지럽혀있다. 저속에서 아웅다웅 아귀다툼하며 살았단 말인가? 호수 같은 운무가 장관을 이루고 호수인가 착각할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운무다.

자주 오는 산악인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이런 날씨 보기 힘들다고 저 멀리 널펀한 삼척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높은 산들을 정상에서 사방을 내려다. 보는 이 절묘함은 어느 효자 아들이 업어다. 구경시킬 수 있을까 오직 부처님 음덕으로 건강함에 기쁘고 이런 곳에 오른 성취감에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벅찬 이 마음을 내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데 이 시각 전화 받을 사람은 막내 지호뿐이다. 그나마 나와 좋은 인연 같다. 전화했다. 감격하며 좋은 기를 나누어주고 싶다. 대청봉이야 넘좋다. 사랑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려 다시 걷기시작 중청봉 대피소엔 많은 인파가 인 산을 이뤘다. 언제 어디서 왔는지 이런 아침에 눈이 쌓였고 얼음이 언 산속 이곳저곳서 아침을 해결하느라 갖가지 싸온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중에 아이들도 섞여있었다. 착하다. 내 자식들을 비교했다. 누가 어미 따라 올려고 할까? 저런 애들은 건강한 정신력이 좋아 넓은 사고를 가지고 성숙하겠지 부럽고 유전자가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남을 부러워하며 박수를 보낸다.

재바르게 갔다 온 탓인지 3시간정도 걸렸다. 한방에 같이 잔 사람들이 참 빨리 갔다. 왔단다. 잠시 쉬었다. 점심공양하고 오세암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렸던 봉정암을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세암으로 간다. 봉정암 정상 뒷길 깎아지른 절벽 내리막길 첫 걸음부터 난관이다. 천길 낭떠러지 질퍽한 물기 있는 내리막길이다.

몇 걸음 먼저 간 노부부 서울서 출발할 때 옆자리에 않았고 부인은 내 옆자리 나와 붙어 자던 그 부부가 남편이 몇 번 굴러 떨어져 피가 낭자해 비탈길에서 안절부절<부인>남편의 붉은 피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봉청회 모집해 온 단원에 전화를 하니 전화가 안 되다.

빨리 누구 좀 스님에게 올라가 말씀드리라고 소리쳤지만 모두 겁에 질려 맨 위에 있던 사람이 갔는지 알 수 없어 그런지 부인이 뛰어 올라갔다. 걸음이나 제정신으로 올라갔는지 조금 있으니 헬기가 떴다. 마침 올라오는 등산객 남자가 자기가 의사라면서 거즈로 지혈을 시키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편했다. 우리들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함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뒤에서 의사선생님이 걸을 수 있어요. 다행히 걸을 수 있단다.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큰 문제없이 외상으로 그쳤음 빈다. 이런 상황들을 뒤로하고 내리막길 내려오는 길은 험했다. 질퍽한 물이 흐르는 바위돌이 미끄럼 타기 좋은 매끈한 큰 바위 돌들이 길이다. 쇠파이프를 한 줄로 박아 놓은 난간대를 잡고 몸을 그곳에 매달려 내려가는 길이 이어졌다. 내 딸을 안 데려 온 것이 다행이다. 혼자가기 그러하니 시험도 끝나고 같이 가자했다. 피곤해 도저히 못가겠다고 해서 혼자 나선 것이다. 참 다행이다.

올려쳐다보니 경사도가 심해 길을 만들 수도 없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녔을 길인데 깎아지른 비탈이다. 보니 비가 오면 머물 곳도 없이 흘러 길이 없는 것은 기정사실의 지형이다. 험한 길을 지나니 조금은 낳은 길이라도 질퍽한 물기에 미끄러워 제대로 걸어 나가기가 힘든 길을 한참을 가다보니, 이제는 오르막 이런 오르막 고개를 크게는 세 고개를 넘어야 오세암이란다. 오세동자가 성불한 곳이라 하니 오세암이란다.

오르기 힘은 들었지만 봉정암 뒤 높은 산 비탈길 질퍽한 길은 이제는 없나보다. 혼자 노래하며 염불하며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갖가지 예쁜 물을 들인 비단옷을 입은 이름 모를 나무들 극락세계 같은 환희에 젖으며 부처님이 나에게도 이런 값진 선물 주심에 감사하며 높은 고개를 넘고 넘어 오세암에 도착하니 또 다른 세계의 부처님 도량이 나타났다. 높은 곳에 있는 봉정암과 달리 낮은 산속에 안정되게 자리 잡은 엄마 품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았다.

그곳에 내가 우리 팀에서 첫 번째 도착 방배정이 되어 있었다. 봉청회 라고 하룻밤 거처할 방이었다. 이곳은 이불 베개도 있었다. 짐을 풀고 먼저 부처님께 참배부터 했다. 무사히 부처님 원력으로 잘 도착 했노라고 보고하고 세면도구를 챙겨 세면장에 가서 홀랑 벗고 깨끗이 닦고 비누는 일체 쓰지 말라고 적어놓아 물로 머리감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뻑뻑한 파마머리 샴푸를 해도 빗이 안 빗겨지는데 이곳 물은 무슨 물 이길래, 참물로 감았는데 데도 매끈거려 기분이 좋았다. 이곳은 봉정암에 비해 물이 철철 흘러버려 물이 흔했다. 참 오랜만에 흘러 내려가는 물에 마음껐 씻었다.

이곳에 일박하고 내일 아침530분에 주먹밥 가지고 어둠을 헤치고 내려가야 한단다. 주말이라 인파가 많아 차를 기다리지 않고 탄단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게 일찍 못 간다는 사람 가야한다는 사람 다수결의 끝에 아침 공양은 미역국에 밥 말아먹지 않고 주먹밥 부탁해서 받아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경험자 자주 오는 사람들에 의하면 주말엔 마을버스<백담사에서용대리가는것>타려면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탄다하니 나도 이왕 온 걸음인데 천천히 더 있고 싶었지만 다수결의에 따라 오세암에서 백담사까지 3시간30분여 어둠을 뚫고 걸었다. 백담사에오니 마을버스가 있었고 선착 순 대로 올랐다.

용대리에오니 한강 고속버스 봉청회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첫 번째 출발하는 10시에 출발한단다. 용대리 이곳엔 사람인파가 올라가는 차를 타기위해 두 줄을 선 줄이 끝이 안 보인다. 참 많은 사람들이다. 산은 저 많은 사람들을 품어줄 것이다. 갖가지 사연들 일상에 찌던 때 벗겨줄 것이다. 몸과 마음의 혼탁함을 청아한 공기로 품어줄 것이다.

나처럼 척박하게 살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나온 때를 벗고 오는 세상은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고 좋은 일들만 가득 채워지길 모두에게 바라며 부처님의 가피를 입길 바랍니다. 표현은 미흡했지만 산은 인생살이 진리를 느끼며 깨달으며 부족한 소치를 깨달음을 주는 곳 철없는 사람을 깨우치는 곳 산 산 도량 고맙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