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여행을 4박5일 일정으로 떠나게 되었다. <온누리여행사>인천공항에서 저녁7시30분 다음날9시50분 도착이란다. 한국하고 시차가 바뀐다. 설래는 마음으로 남편과 꿈에 그리던 하와이 결혼 38년 만에 나의 환갑기념으로 딸이 조선비취호텔 온가족식사비부담금 70만원하고 현금1백만원 도합1백70만원 지훈1백 지호1백 도합 3백만 원으로 가게 되었다. 고맙고 보람이 있다.
그동안 여행준비물과 일정표 티켓팅 모든 걸 둘째며느리 정화가 세세히도 신경 썼다. 사실은 처음엔 중국황산을 가려했는데 딸이 그 돈으로 하와이를 택했다<아가씨일때꼭하와이를 가고 싶었다.>몇 십 년 만에 꿈이 이루어 진 셈이다. 모두 여러모로 신경 쓴 덕택으로 가게 되어 고맙고 고맙다.
2011.9월30일 호놀룰루 오전 도착 바로 투어가 시작되었다. 가이드가 공항에서 꽃다발을 하나씩 목에 걸어주었다. 향이 짙은 꽃으로 만든 풍성하고 멋진 꽃다발을 한사람씩 걸어주니 감동이고 기분이 좋았다. 가이드는 호리호리한 서울사람 아가씨 같았는데 48세란다. 아들이 푸나후하이스쿨 오바마대통령이 다녔던 학교에 다닌단다. 가냘 퍼 보였지만 당찬 여자 4박5일 동안 그와 함께 투어 할 안내양 비행기에 시달렸던 여독도 뒤로하고 맨 처음 카메하메아대왕동상 순금으로 옷을 입힌 동상 특이했다.
미국 점령하기 전 존경받았던 부족이었던 동상 하와이 주정부청사도 그곳에 있었다. 그곳서 모델이 되어 기념촬영 나무들이 우람하면서 푸른 넓은 잎들 사이로 붉은 꽃들이 피어있는 것이 특이하고 아름답고 신기했다. 밀림에 타잔이 줄타기했던 줄기들이 땅을 보고 쭉쭉 늘어진 것이 장관이다. 서늘한 초가을 날씨 바람이 살랑살랑 심한 바람은 안 분단다. 이렇듯 기후가 좋고 공기도 넘 상쾌하다. 그래 그런지 나무들이 하나같이 튼실하고 우람하고 잘 다듬어진 작품 같다.
우기는11월부터 1.2개월가량 강우량이 많단다. 화산섬으로 물이 고이질 안고 빠져버린단다. 1958년 미국50번째 주로 성격 주 꽃 이름이 일리마꽃 기러기 네네<새>일리마꽃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는 무궁화 닮은 꽃이다. 맨 처음 중국 사람들이 사탕수수밭일을 했고 다음은 일본사람 다음은 한국사람 그 당시 17불씩 받고 채찍을 맞아가며 혹독한 노예생활 도망도 못가고 그 유명한 사탕수수밭일을 선조들이 했단다. 결혼은 그곳 사람과는 허락이 안 되고 조국에 사진으로 주고받고 40넘어 결혼하여 부부가 같이 일하며 지금은 4대까지 넘어 후손들이 잘 산단다.
첫날 점심은 갈비식당에서 먹었는데 맛있었다. 다음을 위해 모두가 많이 든든하게 먹으란다. 그곳은 팁 문화라서 각각 2불씩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왔다.
바로 쇼핑몰로 향했다. 유명상품이 진열된 곳 이고저곳 구경해도 무얼 사야 될지 주머니사정도 있고 명품들을 살줄도 모르고 아이쇼핑만하고 시간만 보냈다. 구찌 코찌 빽 들이 유혹했다. 딸보다. 내 며느리 정화가 눈에 밟혔다. 사주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취향에 맞는 것인지도 몰랐고 첫날인데 달러를 다 써 버릴 수도 없었다.
못내 마음에 남았지만 다음기회가 있을 때 사줄 것을 다짐하고 쇼핑몰을 떠나 시내 와이키키해변 부근 식당<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를 곁들인 조촐한 식사 마치고 부근호텔OHANA<오하나>호텔10층19호실3일간 머물기로 했다.
실내는 깔끔했고 냉장고를 얼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마실 물을 사기위해 ABC MAT에서 생수2병을2달러7센트를 주고 샀다. 냉장고에 물 한 병 없는 부자나라미국 땅이다. 모든 물가가 비싸다. 바나나<몽키>손가락 마디만한 것이 하나에1불이다. 과일은 구경도 못했다. 3일 동안 먹을 물을 말도 안 통하는데 사와서 냉장고에 넣어두니 부자 같다. 약 먹을 물 아껴먹자 피곤이 몰려와 바로 잠을 청했다.
아침 7시에 정해준 호텔 옆 식당에서 아침을 소시지에 계란후라이 라이스<밥>커피 그것이 전부 느끼함을 평소에 먹질 않던 나는 커피블랙을 주종 마셨다. 뒷맛이 깔끔함 때문 살기위해 먹는 것 타국에서 탈나면 안 되기에 억지로 먹느라 곤혹 8시20분에 가이드가 차를 대기해 놓아 그 차를 타고 섬 투어를 시작했다.
처음 들린 곳이 이영애가 결혼식한 호텔<가칠라>그곳 안까지 들어갔다 돌아 나왔다. 이 호텔은 치안 보안이 잘되어서 부자귀빈들이 묵는 숙소 미국 일본 각 나라 갑부들이 하루저녁 최소 3천만 원부터 란다. 주변경관이 빼어나고 주위에 갑부들의 별장이 즐비했다.
부익부 빈익빈이라 했던가? 호텔 오기 전 거지들이 잘 다듬어진 잔디 곳곳에 텐트를 치고 거주했다. 미국 본토에서 골치 아파 1천 불씩 주고 따뜻한 이곳에 보내진 거지가 많단다. 이곳에는 나라에서7백 불 주에서 주는 스탬브 2백 불 합치면1천9백 불에 그 주안에 주소가 되어 있는자 시민권자만이 보호받는단다. 이렇듯 거지도 이곳거지는 영어도 할 줄 알고 대접받는다.
부자고급주택가를 지나 한참을 가니 한국 지도마을이 나타났다. 산등성위에 우리나라지도와 똑같은 마을이 있었다. 신기했다. 지나는 곳마다 신기하고 높은 산들이 화산이 만들어낸 주름치마 같이 골이 패인 병풍 같은 돌기둥 그저 신기하고 독특했다.
화산이 만들어 낸 명화 같은 자연 오하우 섬의 상징인 다이야몬드헤드 분화구 전망대를 지나 오바마마을 호수마을 그곳 천혜의 마을에서 미국대통령 오바마가 태어난 곳 좋은 곳에서 큰 인물이 태어나나보다.
한참을 가니 유명한 <돌>농장이 있었다. 어마어마 끝이 보이지 않는 대농장 옛날에 사탕수수농장이었단다. 이곳에서 노예들이 일했던 참혹했던 곳이란다. 지금은 파인애플농장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마치 파밭같이 푸르름이 끝없이 펼쳐져 장관이다.
사람 없는 들판은 고요하다. 이것도 인건비 때문에 수지가 안 맞아 커피를 심어 간단다. 참으로 방대한 끝이 안 보이는 농장이 신기했다. 돌 농장에 차를 세워 과일을 실컷 먹겠거니 했는데 사람들을 관광차로 쏟아내 인산인해 바나나 한 개에1불 파인애플아이스크림 파는 데는 줄을 선 사람들로 장사진을 치고 사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곳을 벗어나 원주민 몬몬교라는 사원이 민속촌이다. 그곳은 입장표를 사서 들어가니 그곳도 줄을 섰다. 어마어마한 사원에서 뷔페식 점심을 먹고 민속촌 부족들의 생활 전통춤과 행사를 구경마치고 다시투어 진주만상륙작전한 곳을 구경하고 끝으로 시내호텔주변 식당에서 저녁 랍스타 중국식요리가 회전식 식탁가운데 돌려가며 덜어서 먹었다. 뷔페 같았다.
3일째 자유 날이다. 일정이 없었다. 스타오브선셋크루즈 1인당1백10불씩 주고 오후5시에 타기로 했다. 오전시간은 와이키키해변에서 수영을 했다. 태양이 광렬 했다. 물이 수정같이 맑았다. 한참을 물속에서 놀다가 모래톱백사장에서 일광욕을 했다. 따끈하고 좋았다.
한국에서 송정해수욕을 갔었는데 물이차서 물에도 못 들어갔는데 이곳은 따뜻하고 모래톱도 깨끗하고 부드럽고 오염되지 않은 태평양바닷물 넘 좋다. 이국만리 와서 수영을 할 줄이야! 참 아름답고 물도 깨끗하고 모래도 깨끗하고 달라붙지도 않고 물속에서 요동을 쳐도 모래가 일어 물이 흐려지지도 않는 천혜의 바다에서 수영할 줄은 꿈인가싶다. 더 머무르고 싶은 미련이 있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로 왔다.
정화가 사준 햇반을 데워서 카레하고 깻잎하고 수저도 없이 비닐장갑으로 먹었다. 이런 준비를 해준 정화 아니었음, 느끼한 빵으로 먹었을 거다. 야무진 며느리 덕에 밥을 먹을 수 있어 고맙다.
기념품을 사야할 텐데 마땅히 살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같이 사는 정화는 선물을 사야할 텐데 야자수원피스가 정화또래 젊은이가 입은 걸보니 예뻤다. 그것을 기념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사러갔다. 생각보다. 비싸다. 한국은 옷이 싼데 비해 이곳은 모든 게 비싸다.
망설이다 19불 몇 센트 20불이다. 그걸 사고 보니 손녀 예쁜 민혜가 눈에 밟혔다. 원피스를 사기로 했다. 애들 것이 더 비싸다. 고급이란다. 30불 줬다. 원단이 어른 것 보다. 좋긴 좋아 보였다. 유나 것도 원피스하나 시원하게 집에서 입긴 좋을 거 같았다.
큰애는 취향도 모르고 같이 살지를 안하니 마땅히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해서 목걸이를 샀다. 이 무렵 달러가 최고로 치솟아 많이 못 바꾸어 왔다. 돈이 많아도 이곳에선 말도 안통하고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같이 간 사람들은 안 샀다.
시간적 여유도 없고 짜여진 단체로 움직이니 자유롭질 않다. 5시 되어 가이드가 왔다. 우리를 데리고 차편으로 크루즈 가는 곳까지 데려다 주고 갔다. 그곳엔 관광버스가 많이 와 있었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정을 받고 이름표 같은걸 가슴에 붙여주었다. 차에 올라 한참을 차로 선착장으로 이동 배를 탔다. 원스타는 1층 투스타는 2층 쓰리스타는 3층 그것도 돈대로 우리는 제일 싼 것 1층에 배정받아 킹크 랩하고 빵하고 주스 조촐했다.
원주민 같은 뚱보가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부르고 흥을 돋웠다. 식사가 끝날 무렵 춤판이 벌어졌다. 같이 간 사람들과 춤을 췄다. 신났다. 원주민 스타와 사진도 찍었다.
본전생각이 날정도로 음식은 너무 조촐했다. 그래도 어쩌랴 단체로 하는 것이고 이것이 실속 없는 돈 잔치인 것을 후해해도 소용없다.
호텔로 왔다. 마지막 밤이다. 3일 밤을 한곳에서 숙박을 하니 수월한 것도 있고 안정적이다. 내일 아침8시20분출발해 가면서 마지막 바람산 이란 곳에 구경하고 공항에 간단다.
산등성이에 있는데 역시 바람이 불었다. 신기했다. 온누리여행사 10명이 한조가 되어서 한차로 투어를 같이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다. 우리부부, 삼촌과 조카<남자둘>여자모녀<둘>여자 네 명<친구끼리>모두 열 명이 조가 되어 같이 투어하면서 웃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아름다운 하와이여행 또 언제 이곳에 오려나? 조용하고 공기 기후가 넘 좋다.
몇 십 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설악산에 있는 봉정암에 가게 되었다. 삼세 인연법이 닿아야 간다라는 말대로 많은 기다림 끝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우연히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봉은사 가는 중에 옆자리 않은 아주머니가 부산고향 말로 어디 가느냐 묻기에 봉은사 간다하니 본인도 숙대부근에 사는데 봉은사 다닌다고 고향사람이라 반기며, 내일 금요일 봉정암 가기로 했는데 사정이 생겨 못 간다고 11월 달에도 가는 날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했다. 전화번호 주고받고 헤어졌다, 봉은사 절에 참배하고 불현 듯 내일 가야겠다는 마음이 치솟아 나 혼자 라도 가고 싶었다.
드디어 2010년 10월22일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서울에서 잠실 4번 출구 나가니 한강고속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봉정암 가는 차편이었다. 강원도 용대리에 도착 그곳에서 마을버스타고 백담사에 내려 참배하고<그곳은 전직 전두환 대통령귀거하던곳> 구경하고 출발하여 영시암 도착 점심공양하고<영시암은 오가는 길손들 무료로 국수를 준다.. 총각김치가 넘 맛있었다> 곧장 걷기 시작하여 정학한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6시간 걸어야 된단다<영시암에서 봉정암까지>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 약3시간 남짓<모든 시간은 초행이라 시간은 정확히 계산안하고 했기에 정확하지 않다>
삼세인연법에 멋모르고 나선 길 아는 동행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백담사에서 걷고 또 걷고 봉정암을 향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봉정암 도대체 어디에 꼭꼭 숨었기에 육신의 고통을 감내할까? 전생에 얼마나 많은 억 급을 지었기에 다리에 지가 나도록 숨이 헉헉 기어오르다가 또 평지 평생에 이런 길은 처음 걸어보는 것이다. 살아 희, 노, 애 .락 ,모두 맛보는 것 같다.
완만한 길을 가다가 철계단을 가다. 오르막 구름다리를 건너갈 때 부처님 조화인가 첩첩산중에 예쁜 무지개다리 구름다리 말로 표현 못할 멋지고 감동의 전율이 솟구친다. 산속깊이 과연 인간에 힘으로 이런 멋진 다리를 놓았을까 그림 같은 폭포가 쏟아지고 눈으로 다. 담을 수 없는 풍광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입은 색깔들의 선명한 고운 잎들 오염되지 않은 지상낙원 고달 펐던 일상의 무게들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감사하며 또 걷다보면 가파른 오르막을 잡을 것조차도 없을 정도로 기어오르고 넘어서면 또 평지 또 철계단 또 오르막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도 이렇게 혹독했지만 중간 중간 그림 같은 구름다리도 만나고 좋은 틈새가 있어 내가 버틸 수 있지 않았나하며 자위하며 이렇게 나를 변화시키며 이곳까지 이제껏 내가 있지 않는가?
고통 속에 맛보는 경관 진국 같은 이 순간 혼자 외로움에 치를 떨다가도 환희에 젖어 아, 내게도 이런 오감을 맛볼 때가 있구나! 혼자 맛보기가 아쉬워 내 가족을 떠 올렸다. 남편은 시험 준비에 바쁘고<공인중개사> 딸은 의사고시 아들은 의사선생님 막내아들은 무슨 공부인지 또 시험 준비하느라, 이 좋은 아름답고 경치 좋고 맑은 공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떨어지는 폭포 수정보다 맑은 물과 공기 이생에서 그 누가<내식구>중에 이 맛을 보려 이런 무릉도원에 발 디딜까 묻고 싶다.
저들을 나와 같이 밑바닥생활을 벗어나게 하려고 온갖 시름 겪으면 지옥불이라도 들락거리며 수모를 당하면서라도 저들을 편하고 인간답게 대접받게 하려고 노력한 덕인가 잘 먹고 잘되었다. 저만하면 사회 상위 일원으로 살아간다. 못 먹고 못 입고 손가락질 당해가며 버티며 누구도 감히 흉내 못 낼 의사 둘에다 공무원, 셋을 그림처럼 길러 내다보니 헐벗은 건 당연한 것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저들이 복이 있으니 나와 같은 어미를 만난 거니깐. 이제는 세상이 풍부해졌다. 먹거리도 풍족해지고 내 새끼들이 공부할 땐 왜 그리도 부족하고 가난했었는지 그때는 쌀과 연탄만 그득하면 부자 안 부러울 정도로 궁핍한 시대였다. 갈수록 살기가 좋아지지만 한번 맨 땅을 치고 일어서기가 많은 힘이든 다. 여전히 어려운 사람은 어렵게 산다. 내가족 내 식구들도 이런 무릉도원을 맛보이고 싶다.
이것도 욕심일까 깊은 산중을 들어설수록 자연의 이치가 사람의 생활과 같다. 내리막과 오르막 죽을 것 같이 긴 고통 오감을 맛보며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난다. 가냘픈 여자에서 1녀2남의 어미라는 책임감이 시작되었다. 나는 비록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지만 금쪽같은 내 자식들은 무슨 짓을 하드래도 밑바닥에서 벗어나게 해아 한다는 사명감이 무게가 실렸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현실 앞에 설움이 복받쳐 울어본들 누구하나 붙잡을 언덕이 없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았다. 식당에 설거지 밑천 없이 시작한 국자에 설탕 녹여 팔 때 부끄러워 수건을 덮어쓰고 남을 의식하다가, 그것도 사치 같아 벗어던지고 대담해졌다. 쌀이 없어 애들을 굶길 순 없었기에 무능한 남편은 10원짜리 공중전화 걸 돈이 없어 골방에서 꼼짝도 안하고 시골 가서 고구마라도 얻어오려고 갔다가, 괴모와 아버지에게 입고 간 옷을 뜯기여 울면서 빈손으로 왔다.
10원 짜리 똥과자 장사를 하니, 저녁이면 10원짜리 돈이 그득 쌀을 한 되씩 살 수가 있어서, 애들을 먹일 수 있었다. 참담했다. 여기서부터 장사가 시작되었고 용기를 얻어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크게는 땅장사 집장사 밑천은 집안오빠가 고등법원행정고시해서 공무원으로 있었다. 처녀 때부터 각별히 잘 챙겨 오빠친구 오빠 나 3명이 투자를 해서 내가 땅을 사서 많이 남아 셋이 똑같이 나누고, 난 덤으로 많이 챙겨주어서, 그것이 발판이 되어 집장사가 시작되었다.
밑돌 빼어서 윗돌 공구고 이사를 밥먹듯해가며 남에게 빌린 빛을 줄이고 나중엔 남이 부러워하는 좋은 집도 사고 애들 가르치는데 걱정 없이 되었다. 지나온 시련을 어찌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금쪽같은 내 자녀들 첫째 딸이 동생들 잘 챙겼고 공부들도 잘해주었다.
너무도 어려운 시절 부처님 찾아가는 도량에서 참회합니다. 헐 벗고 살면서 오로지 내 자식들만 위하고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나름 바른 길로 달렸습니다. 부족한 점 참회합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봉정암 이래서 삼세인연법이 없으면 못 온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걷고 또 걸어서 도착했다.
봉황이 활짝 편 날개 중에 왼쪽 날개 밑에 법당이 있고 정수리 머리에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신기하게도 바위에 놓여있다. 옆으로 용화상 맞은 건너에 코끼리 바위 사리탑 전망대에서 내려 보니 깎아지른 바위산들 천길 낭떠러지 부처님의 도량 지상낙원일세! 이렇게 높은 곳에 부처님 도량이 있는 걸 눈으로 실감하며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이곳에서 일박하고 내일 오세암으로 간다. 방을 배정받은 것은 가로 세로 재어 보지 않았다. 보통사람 반듯이 눕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워도 그려놓은 금을 넘어 서로서로 들 붙어서 잠을 자야한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넓은 공간이라 한다. 자로 그어 놓은 칸수가 9백9칸인데 이곳에서 조차도 못자고 한데<바깥>에서 많이 잤단다. 요즈음은 예약제가 되어 바깥에서 자는 일은 없단다.
죄 많은 나에게도 날씨 덕은 있는지 춥다고 겨울옷을 준비해 오라 했는데 그런 대로 견딜 만 할 정도로 따뜻하고 날씨도 청명했다. 바람도 없고 죄 중에 좋은 죄도 있었나보다. 공양은 미역국에 밥 한 덩이 오이무침 몇 조각 이것도 이런 환경 속에선 감사하고 훌륭하다. 사람 몸도 놓아두고 올 정도로 험하고 깊은 구중산중 꼭대기다.
이런 곳에 물도 귀하다. 설산에서 고행하신 부처님에 비하면 행복이랄까 감사하다. 죄 많은 인생이 단단히 고행 맛을 보나 보다. 도착해 방 배정 받고 걸머지고 온 짐은 풀어놓고 세면장에 내려가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같이 온 사람들은 홀랑 벗고 목욕재개 하는걸 보니 한기를 느껴 난 못하고 씻을 수 있는 곳만 씻고 방에 오니 어스스 추웠다. 따뜻하고 편리한 집이 아닌 설산이라 생각하자 정신차려보려고 애썼다. 부처님 참배하고 이곳저곳 신기하기 만한 딴 세상 구경하고 밤을 지샜다. 밤에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고행이었다.
날이 밝았다. 5시30분 참배하고 공양하고 6시25분에 대청봉엘 가잔다. 이곳까지 와서 대청봉에 가자고 모두 나서 자의반 타의반 막상 나서고 보니 어제 깔닥고개 오르는 것과 같은 오르막을 소청봉까지 계속되었다. 잘못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너무 힘이 들었다. 내친 길 부처님 욕심을 부려 죄송합니다.
무사히 잘 갔다 오게 해달라고 염불하며 헉헉거리며 걷고 또 걷고 소청봉 휴게소<대피소> 중청봉대피소 지나 대청봉 정상에 도착 사방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히 저 밑에 인간 세상이 어지럽혀있다. 저속에서 아웅다웅 아귀다툼하며 살았단 말인가? 호수 같은 운무가 장관을 이루고 호수인가 착각할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운무다.
자주 오는 산악인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이런 날씨 보기 힘들다고 저 멀리 널펀한 삼척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높은 산들을 정상에서 사방을 내려다. 보는 이 절묘함은 어느 효자 아들이 업어다. 구경시킬 수 있을까 오직 부처님 음덕으로 건강함에 기쁘고 이런 곳에 오른 성취감에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벅찬 이 마음을 내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데 이 시각 전화 받을 사람은 막내 지호뿐이다. 그나마 나와 좋은 인연 같다. 전화했다. 감격하며 좋은 기를 나누어주고 싶다. 대청봉이야 넘좋다. 사랑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려 다시 걷기시작 중청봉 대피소엔 많은 인파가 인 산을 이뤘다. 언제 어디서 왔는지 이런 아침에 눈이 쌓였고 얼음이 언 산속 이곳저곳서 아침을 해결하느라 갖가지 싸온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중에 아이들도 섞여있었다. 착하다. 내 자식들을 비교했다. 누가 어미 따라 올려고 할까? 저런 애들은 건강한 정신력이 좋아 넓은 사고를 가지고 성숙하겠지 부럽고 유전자가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남을 부러워하며 박수를 보낸다.
재바르게 갔다 온 탓인지 3시간정도 걸렸다. 한방에 같이 잔 사람들이 참 빨리 갔다. 왔단다. 잠시 쉬었다. 점심공양하고 오세암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렸던 봉정암을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세암으로 간다. 봉정암 정상 뒷길 깎아지른 절벽 내리막길 첫 걸음부터 난관이다. 천길 낭떠러지 질퍽한 물기 있는 내리막길이다.
몇 걸음 먼저 간 노부부 서울서 출발할 때 옆자리에 않았고 부인은 내 옆자리 나와 붙어 자던 그 부부가 남편이 몇 번 굴러 떨어져 피가 낭자해 비탈길에서 안절부절<부인>남편의 붉은 피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봉청회 모집해 온 단원에 전화를 하니 전화가 안 되다.
빨리 누구 좀 스님에게 올라가 말씀드리라고 소리쳤지만 모두 겁에 질려 맨 위에 있던 사람이 갔는지 알 수 없어 그런지 부인이 뛰어 올라갔다. 걸음이나 제정신으로 올라갔는지 조금 있으니 헬기가 떴다. 마침 올라오는 등산객 남자가 자기가 의사라면서 거즈로 지혈을 시키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편했다. 우리들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함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뒤에서 의사선생님이 걸을 수 있어요. 다행히 걸을 수 있단다.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큰 문제없이 외상으로 그쳤음 빈다. 이런 상황들을 뒤로하고 내리막길 내려오는 길은 험했다. 질퍽한 물이 흐르는 바위돌이 미끄럼 타기 좋은 매끈한 큰 바위 돌들이 길이다. 쇠파이프를 한 줄로 박아 놓은 난간대를 잡고 몸을 그곳에 매달려 내려가는 길이 이어졌다. 내 딸을 안 데려 온 것이 다행이다. 혼자가기 그러하니 시험도 끝나고 같이 가자했다. 피곤해 도저히 못가겠다고 해서 혼자 나선 것이다. 참 다행이다.
올려쳐다보니 경사도가 심해 길을 만들 수도 없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녔을 길인데 깎아지른 비탈이다. 보니 비가 오면 머물 곳도 없이 흘러 길이 없는 것은 기정사실의 지형이다. 험한 길을 지나니 조금은 낳은 길이라도 질퍽한 물기에 미끄러워 제대로 걸어 나가기가 힘든 길을 한참을 가다보니, 이제는 오르막 이런 오르막 고개를 크게는 세 고개를 넘어야 오세암이란다. 오세동자가 성불한 곳이라 하니 오세암이란다.
오르기 힘은 들었지만 봉정암 뒤 높은 산 비탈길 질퍽한 길은 이제는 없나보다. 혼자 노래하며 염불하며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갖가지 예쁜 물을 들인 비단옷을 입은 이름 모를 나무들 극락세계 같은 환희에 젖으며 부처님이 나에게도 이런 값진 선물 주심에 감사하며 높은 고개를 넘고 넘어 오세암에 도착하니 또 다른 세계의 부처님 도량이 나타났다. 높은 곳에 있는 봉정암과 달리 낮은 산속에 안정되게 자리 잡은 엄마 품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았다.
그곳에 내가 우리 팀에서 첫 번째 도착 방배정이 되어 있었다. 봉청회 라고 하룻밤 거처할 방이었다. 이곳은 이불 베개도 있었다. 짐을 풀고 먼저 부처님께 참배부터 했다. 무사히 부처님 원력으로 잘 도착 했노라고 보고하고 세면도구를 챙겨 세면장에 가서 홀랑 벗고 깨끗이 닦고 비누는 일체 쓰지 말라고 적어놓아 물로 머리감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뻑뻑한 파마머리 샴푸를 해도 빗이 안 빗겨지는데 이곳 물은 무슨 물 이길래, 참물로 감았는데 데도 매끈거려 기분이 좋았다. 이곳은 봉정암에 비해 물이 철철 흘러버려 물이 흔했다. 참 오랜만에 흘러 내려가는 물에 마음껐 씻었다.
이곳에 일박하고 내일 아침5시30분에 주먹밥 가지고 어둠을 헤치고 내려가야 한단다. 주말이라 인파가 많아 차를 기다리지 않고 탄단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게 일찍 못 간다는 사람 가야한다는 사람 다수결의 끝에 아침 공양은 미역국에 밥 말아먹지 않고 주먹밥 부탁해서 받아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경험자 자주 오는 사람들에 의하면 주말엔 마을버스<백담사에서용대리가는것>타려면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탄다하니 나도 이왕 온 걸음인데 천천히 더 있고 싶었지만 다수결의에 따라 오세암에서 백담사까지 3시간30분여 어둠을 뚫고 걸었다. 백담사에오니 마을버스가 있었고 선착 순 대로 올랐다.
용대리에오니 한강 고속버스 봉청회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첫 번째 출발하는 10시에 출발한단다. 용대리 이곳엔 사람인파가 올라가는 차를 타기위해 두 줄을 선 줄이 끝이 안 보인다. 참 많은 사람들이다. 산은 저 많은 사람들을 품어줄 것이다. 갖가지 사연들 일상에 찌던 때 벗겨줄 것이다. 몸과 마음의 혼탁함을 청아한 공기로 품어줄 것이다.
나처럼 척박하게 살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나온 때를 벗고 오는 세상은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고 좋은 일들만 가득 채워지길 모두에게 바라며 부처님의 가피를 입길 바랍니다. 표현은 미흡했지만 산은 인생살이 진리를 느끼며 깨달으며 부족한 소치를 깨달음을 주는 곳 철없는 사람을 깨우치는 곳 산 산 도량 고맙고 사랑합니다!
봉정암 2010, 10월,24일 저녁 늦은 시간
양진이
몇 십 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설악산에 있는 봉정암에 가게 되었다. 삼세 인연법이 닿아야 간다라는 말대로 많은 기다림 끝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우연히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봉은사 가는 중에 옆자리 않은 아주머니가 부산고향 말로 어디 가느냐 묻기에 봉은사 간다하니 본인도 숙대부근에 사는데 봉은사 다닌다고 고향사람이라 반기며, 내일 금요일 봉정암 가기로 했는데 사정이 생겨 못 간다고 11월 달에도 가는 날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했다. 전화번호 주고받고 헤어졌다, 봉은사 절에 참배하고 불현 듯 내일 가야겠다는 마음이 치솟아 나 혼자 라도 가고 싶었다.
드디어 2010년 10월22일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서울에서 잠실 4번 출구 나가니 한강고속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봉정암 가는 차편이었다. 강원도 용대리에 도착 그곳에서 마을버스타고 백담사에 내려 참배하고<그곳은 전직 전두환 대통령귀거하던곳> 구경하고 출발하여 영시암 도착 점심공양하고<영시암은 오가는 길손들 무료로 국수를 준다.. 총각김치가 넘 맛있었다> 곧장 걷기 시작하여 정학한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6시간 걸어야 된단다<영시암에서 봉정암까지>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 약3시간 남짓<모든 시간은 초행이라 시간은 정확히 계산안하고 했기에 정확하지 않다>
삼세인연법에 멋모르고 나선 길 아는 동행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백담사에서 걷고 또 걷고 봉정암을 향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봉정암 도대체 어디에 꼭꼭 숨었기에 육신의 고통을 감내할까? 전생에 얼마나 많은 억 급을 지었기에 다리에 지가 나도록 숨이 헉헉 기어오르다가 또 평지 평생에 이런 길은 처음 걸어보는 것이다. 살아 희, 노, 애 .락 ,모두 맛보는 것 같다.
완만한 길을 가다가 철계단을 가다. 오르막 구름다리를 건너갈 때 부처님 조화인가 첩첩산중에 예쁜 무지개다리 구름다리 말로 표현 못할 멋지고 감동의 전율이 솟구친다. 산속깊이 과연 인간에 힘으로 이런 멋진 다리를 놓았을까 그림 같은 폭포가 쏟아지고 눈으로 다. 담을 수 없는 풍광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입은 색깔들의 선명한 고운 잎들 오염되지 않은 지상낙원 고달 펐던 일상의 무게들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감사하며 또 걷다보면 가파른 오르막을 잡을 것조차도 없을 정도로 기어오르고 넘어서면 또 평지 또 철계단 또 오르막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도 이렇게 혹독했지만 중간 중간 그림 같은 구름다리도 만나고 좋은 틈새가 있어 내가 버틸 수 있지 않았나하며 자위하며 이렇게 나를 변화시키며 이곳까지 이제껏 내가 있지 않는가?
고통 속에 맛보는 경관 진국 같은 이 순간 혼자 외로움에 치를 떨다가도 환희에 젖어 아, 내게도 이런 오감을 맛볼 때가 있구나! 혼자 맛보기가 아쉬워 내 가족을 떠 올렸다. 남편은 시험 준비에 바쁘고<공인중개사> 딸은 의사고시 아들은 의사선생님 막내아들은 무슨 공부인지 또 시험 준비하느라, 이 좋은 아름답고 경치 좋고 맑은 공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떨어지는 폭포 수정보다 맑은 물과 공기 이생에서 그 누가<내식구>중에 이 맛을 보려 이런 무릉도원에 발 디딜까 묻고 싶다.
저들을 나와 같이 밑바닥생활을 벗어나게 하려고 온갖 시름 겪으면 지옥불이라도 들락거리며 수모를 당하면서라도 저들을 편하고 인간답게 대접받게 하려고 노력한 덕인가 잘 먹고 잘되었다. 저만하면 사회 상위 일원으로 살아간다. 못 먹고 못 입고 손가락질 당해가며 버티며 누구도 감히 흉내 못 낼 의사 둘에다 공무원, 셋을 그림처럼 길러 내다보니 헐벗은 건 당연한 것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저들이 복이 있으니 나와 같은 어미를 만난 거니깐. 이제는 세상이 풍부해졌다. 먹거리도 풍족해지고 내 새끼들이 공부할 땐 왜 그리도 부족하고 가난했었는지 그때는 쌀과 연탄만 그득하면 부자 안 부러울 정도로 궁핍한 시대였다. 갈수록 살기가 좋아지지만 한번 맨 땅을 치고 일어서기가 많은 힘이든 다. 여전히 어려운 사람은 어렵게 산다. 내가족 내 식구들도 이런 무릉도원을 맛보이고 싶다.
이것도 욕심일까 깊은 산중을 들어설수록 자연의 이치가 사람의 생활과 같다. 내리막과 오르막 죽을 것 같이 긴 고통 오감을 맛보며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난다. 가냘픈 여자에서 1녀2남의 어미라는 책임감이 시작되었다. 나는 비록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지만 금쪽같은 내 자식들은 무슨 짓을 하드래도 밑바닥에서 벗어나게 해아 한다는 사명감이 무게가 실렸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현실 앞에 설움이 복받쳐 울어본들 누구하나 붙잡을 언덕이 없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았다. 식당에 설거지 밑천 없이 시작한 국자에 설탕 녹여 팔 때 부끄러워 수건을 덮어쓰고 남을 의식하다가, 그것도 사치 같아 벗어던지고 대담해졌다. 쌀이 없어 애들을 굶길 순 없었기에 무능한 남편은 10원짜리 공중전화 걸 돈이 없어 골방에서 꼼짝도 안하고 시골 가서 고구마라도 얻어오려고 갔다가, 괴모와 아버지에게 입고 간 옷을 뜯기여 울면서 빈손으로 왔다.
10원 짜리 똥과자 장사를 하니, 저녁이면 10원짜리 돈이 그득 쌀을 한 되씩 살 수가 있어서, 애들을 먹일 수 있었다. 참담했다. 여기서부터 장사가 시작되었고 용기를 얻어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크게는 땅장사 집장사 밑천은 집안오빠가 고등법원행정고시해서 공무원으로 있었다. 처녀 때부터 각별히 잘 챙겨 오빠친구 오빠 나 3명이 투자를 해서 내가 땅을 사서 많이 남아 셋이 똑같이 나누고, 난 덤으로 많이 챙겨주어서, 그것이 발판이 되어 집장사가 시작되었다.
밑돌 빼어서 윗돌 공구고 이사를 밥먹듯해가며 남에게 빌린 빛을 줄이고 나중엔 남이 부러워하는 좋은 집도 사고 애들 가르치는데 걱정 없이 되었다. 지나온 시련을 어찌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금쪽같은 내 자녀들 첫째 딸이 동생들 잘 챙겼고 공부들도 잘해주었다.
너무도 어려운 시절 부처님 찾아가는 도량에서 참회합니다. 헐 벗고 살면서 오로지 내 자식들만 위하고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나름 바른 길로 달렸습니다. 부족한 점 참회합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봉정암 이래서 삼세인연법이 없으면 못 온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걷고 또 걸어서 도착했다.
봉황이 활짝 편 날개 중에 왼쪽 날개 밑에 법당이 있고 정수리 머리에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신기하게도 바위에 놓여있다. 옆으로 용화상 맞은 건너에 코끼리 바위 사리탑 전망대에서 내려 보니 깎아지른 바위산들 천길 낭떠러지 부처님의 도량 지상낙원일세! 이렇게 높은 곳에 부처님 도량이 있는 걸 눈으로 실감하며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이곳에서 일박하고 내일 오세암으로 간다. 방을 배정받은 것은 가로 세로 재어 보지 않았다. 보통사람 반듯이 눕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워도 그려놓은 금을 넘어 서로서로 들 붙어서 잠을 자야한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넓은 공간이라 한다. 자로 그어 놓은 칸수가 9백9칸인데 이곳에서 조차도 못자고 한데<바깥>에서 많이 잤단다. 요즈음은 예약제가 되어 바깥에서 자는 일은 없단다.
죄 많은 나에게도 날씨 덕은 있는지 춥다고 겨울옷을 준비해 오라 했는데 그런 대로 견딜 만 할 정도로 따뜻하고 날씨도 청명했다. 바람도 없고 죄 중에 좋은 죄도 있었나보다. 공양은 미역국에 밥 한 덩이 오이무침 몇 조각 이것도 이런 환경 속에선 감사하고 훌륭하다. 사람 몸도 놓아두고 올 정도로 험하고 깊은 구중산중 꼭대기다.
이런 곳에 물도 귀하다. 설산에서 고행하신 부처님에 비하면 행복이랄까 감사하다. 죄 많은 인생이 단단히 고행 맛을 보나 보다. 도착해 방 배정 받고 걸머지고 온 짐은 풀어놓고 세면장에 내려가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같이 온 사람들은 홀랑 벗고 목욕재개 하는걸 보니 한기를 느껴 난 못하고 씻을 수 있는 곳만 씻고 방에 오니 어스스 추웠다. 따뜻하고 편리한 집이 아닌 설산이라 생각하자 정신차려보려고 애썼다. 부처님 참배하고 이곳저곳 신기하기 만한 딴 세상 구경하고 밤을 지샜다. 밤에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고행이었다.
날이 밝았다. 5시30분 참배하고 공양하고 6시25분에 대청봉엘 가잔다. 이곳까지 와서 대청봉에 가자고 모두 나서 자의반 타의반 막상 나서고 보니 어제 깔닥고개 오르는 것과 같은 오르막을 소청봉까지 계속되었다. 잘못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너무 힘이 들었다. 내친 길 부처님 욕심을 부려 죄송합니다.
무사히 잘 갔다 오게 해달라고 염불하며 헉헉거리며 걷고 또 걷고 소청봉 휴게소<대피소> 중청봉대피소 지나 대청봉 정상에 도착 사방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히 저 밑에 인간 세상이 어지럽혀있다. 저속에서 아웅다웅 아귀다툼하며 살았단 말인가? 호수 같은 운무가 장관을 이루고 호수인가 착각할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운무다.
자주 오는 산악인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이런 날씨 보기 힘들다고 저 멀리 널펀한 삼척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높은 산들을 정상에서 사방을 내려다. 보는 이 절묘함은 어느 효자 아들이 업어다. 구경시킬 수 있을까 오직 부처님 음덕으로 건강함에 기쁘고 이런 곳에 오른 성취감에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벅찬 이 마음을 내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데 이 시각 전화 받을 사람은 막내 지호뿐이다. 그나마 나와 좋은 인연 같다. 전화했다. 감격하며 좋은 기를 나누어주고 싶다. 대청봉이야 넘좋다. 사랑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려 다시 걷기시작 중청봉 대피소엔 많은 인파가 인 산을 이뤘다. 언제 어디서 왔는지 이런 아침에 눈이 쌓였고 얼음이 언 산속 이곳저곳서 아침을 해결하느라 갖가지 싸온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중에 아이들도 섞여있었다. 착하다. 내 자식들을 비교했다. 누가 어미 따라 올려고 할까? 저런 애들은 건강한 정신력이 좋아 넓은 사고를 가지고 성숙하겠지 부럽고 유전자가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남을 부러워하며 박수를 보낸다.
재바르게 갔다 온 탓인지 3시간정도 걸렸다. 한방에 같이 잔 사람들이 참 빨리 갔다. 왔단다. 잠시 쉬었다. 점심공양하고 오세암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렸던 봉정암을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세암으로 간다. 봉정암 정상 뒷길 깎아지른 절벽 내리막길 첫 걸음부터 난관이다. 천길 낭떠러지 질퍽한 물기 있는 내리막길이다.
몇 걸음 먼저 간 노부부 서울서 출발할 때 옆자리에 않았고 부인은 내 옆자리 나와 붙어 자던 그 부부가 남편이 몇 번 굴러 떨어져 피가 낭자해 비탈길에서 안절부절<부인>남편의 붉은 피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봉청회 모집해 온 단원에 전화를 하니 전화가 안 되다.
빨리 누구 좀 스님에게 올라가 말씀드리라고 소리쳤지만 모두 겁에 질려 맨 위에 있던 사람이 갔는지 알 수 없어 그런지 부인이 뛰어 올라갔다. 걸음이나 제정신으로 올라갔는지 조금 있으니 헬기가 떴다. 마침 올라오는 등산객 남자가 자기가 의사라면서 거즈로 지혈을 시키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편했다. 우리들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함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뒤에서 의사선생님이 걸을 수 있어요. 다행히 걸을 수 있단다.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큰 문제없이 외상으로 그쳤음 빈다. 이런 상황들을 뒤로하고 내리막길 내려오는 길은 험했다. 질퍽한 물이 흐르는 바위돌이 미끄럼 타기 좋은 매끈한 큰 바위 돌들이 길이다. 쇠파이프를 한 줄로 박아 놓은 난간대를 잡고 몸을 그곳에 매달려 내려가는 길이 이어졌다. 내 딸을 안 데려 온 것이 다행이다. 혼자가기 그러하니 시험도 끝나고 같이 가자했다. 피곤해 도저히 못가겠다고 해서 혼자 나선 것이다. 참 다행이다.
올려쳐다보니 경사도가 심해 길을 만들 수도 없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녔을 길인데 깎아지른 비탈이다. 보니 비가 오면 머물 곳도 없이 흘러 길이 없는 것은 기정사실의 지형이다. 험한 길을 지나니 조금은 낳은 길이라도 질퍽한 물기에 미끄러워 제대로 걸어 나가기가 힘든 길을 한참을 가다보니, 이제는 오르막 이런 오르막 고개를 크게는 세 고개를 넘어야 오세암이란다. 오세동자가 성불한 곳이라 하니 오세암이란다.
오르기 힘은 들었지만 봉정암 뒤 높은 산 비탈길 질퍽한 길은 이제는 없나보다. 혼자 노래하며 염불하며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갖가지 예쁜 물을 들인 비단옷을 입은 이름 모를 나무들 극락세계 같은 환희에 젖으며 부처님이 나에게도 이런 값진 선물 주심에 감사하며 높은 고개를 넘고 넘어 오세암에 도착하니 또 다른 세계의 부처님 도량이 나타났다. 높은 곳에 있는 봉정암과 달리 낮은 산속에 안정되게 자리 잡은 엄마 품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았다.
그곳에 내가 우리 팀에서 첫 번째 도착 방배정이 되어 있었다. 봉청회 라고 하룻밤 거처할 방이었다. 이곳은 이불 베개도 있었다. 짐을 풀고 먼저 부처님께 참배부터 했다. 무사히 부처님 원력으로 잘 도착 했노라고 보고하고 세면도구를 챙겨 세면장에 가서 홀랑 벗고 깨끗이 닦고 비누는 일체 쓰지 말라고 적어놓아 물로 머리감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뻑뻑한 파마머리 샴푸를 해도 빗이 안 빗겨지는데 이곳 물은 무슨 물 이길래, 참물로 감았는데 데도 매끈거려 기분이 좋았다. 이곳은 봉정암에 비해 물이 철철 흘러버려 물이 흔했다. 참 오랜만에 흘러 내려가는 물에 마음껐 씻었다.
이곳에 일박하고 내일 아침5시30분에 주먹밥 가지고 어둠을 헤치고 내려가야 한단다. 주말이라 인파가 많아 차를 기다리지 않고 탄단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게 일찍 못 간다는 사람 가야한다는 사람 다수결의 끝에 아침 공양은 미역국에 밥 말아먹지 않고 주먹밥 부탁해서 받아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경험자 자주 오는 사람들에 의하면 주말엔 마을버스<백담사에서용대리가는것>타려면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탄다하니 나도 이왕 온 걸음인데 천천히 더 있고 싶었지만 다수결의에 따라 오세암에서 백담사까지 3시간30분여 어둠을 뚫고 걸었다. 백담사에오니 마을버스가 있었고 선착 순 대로 올랐다.
용대리에오니 한강 고속버스 봉청회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첫 번째 출발하는 10시에 출발한단다. 용대리 이곳엔 사람인파가 올라가는 차를 타기위해 두 줄을 선 줄이 끝이 안 보인다. 참 많은 사람들이다. 산은 저 많은 사람들을 품어줄 것이다. 갖가지 사연들 일상에 찌던 때 벗겨줄 것이다. 몸과 마음의 혼탁함을 청아한 공기로 품어줄 것이다.
나처럼 척박하게 살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나온 때를 벗고 오는 세상은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고 좋은 일들만 가득 채워지길 모두에게 바라며 부처님의 가피를 입길 바랍니다. 표현은 미흡했지만 산은 인생살이 진리를 느끼며 깨달으며 부족한 소치를 깨달음을 주는 곳 철없는 사람을 깨우치는 곳 산 산 도량 고맙고 사랑합니다!